한효순

한효순
韓孝純
출생1543년
사망1621년
성별남성
국적조선
경력의병장
직업문신,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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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순(韓孝純, 1543년 ~ 162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다.[1]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본관은 청주로, 한백겸, 한준겸의 숙부이며, 인조비 인열왕후의 종조부이다.

생애

본관은 청주, 자는 면숙 또는 면부, 호는 월탄으로 과거 급제 후 관직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1543년(중종 38)에 태어나 1621년(광해군 13)에 죽었다. 《광해군일기》(서인들이 편찬)의 졸기에서는 그를 심하게 악평했다.[2]

1568년에 생원이 되어 157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되었고 수찬을 거쳐 영해 부사까지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 토벌을 선언하고 격문을 살포,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후 영해 지역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경상좌도 관찰사[3]로 특진했으며 순찰사를 겸해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594년 병조참판을 거쳐 1596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체찰부사가 되었다.

1597년 중추부지사가 되고 1601년에는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함경도관찰사를 거쳐서 1604년에는 이조판서에까지 올랐으며 1605년 평안도관찰사, 중추부판사 등을 거쳐 1606년 우찬성이 되었다. 1610년에는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폐모론이 정국의 치열한 쟁점으로 부상했으나 그는 사태의 확산을 막는 것으로 일관했고 그 방법은 (결과로 보면) 성공했다.[4]

사후

그러나 사후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관직이 추탈되었다. 편저로는 《신기비결》, 《진설》이 있다.

1873년(고종 10)에 가서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중암 김평묵(金平黙)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도전, 이현일, 윤휴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자 최익현김평묵은 이를 막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1873년(고종 10)부터 1876년까지 최익현김평묵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남인(南人)인 윤휴(尹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의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올바른 선비들이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하여 이들의 복권 여론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그 뒤에도 최익현김평묵남인이인좌의 난 관련자들의 복권을 결사 반대하였다. 결국 김평묵과 최익현이 모두 죽은 뒤 1907년(융희 2년)에 가서야 윤휴, 이현일 등과 함께 복권된다.

복권

1907년(융희 1년) 이후 이완용의 여러번의 복권 상소로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5] 1908년(융희 2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다.[6]

1908년 4월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회복되었다.[5]

드라마에서

저서

같이 보기

각주

  1. 한효순 - 한국학중앙연구원
  2. 《광해군일기(중초)》권58, 광해군 13년(1621) 11월 15일(임자) 1번째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악평의 심한 정도는 허균(허균은 이미 선조대부터 악평을 여러 번이나 들은 적이 있다), 박엽(개인 문집이 남아있으며, 놀랍게도 노론인 홍직필이 〈朴燁傳〉(《매산집》 권51)을 지었다), 기자헌(그러나 허목의 〈奇相國事〉(《기언》 권26)은 이와 완전히 반대로 기술되었다) 등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3. 전란 중의 임시 분도
  4. 한영우,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 - 월탄 한효순 이야기》, 지식산업사, 2016, 22면. 폐모론과 한효순의 관계는 이 책 206~87면을 참조.
  5.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6.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1월 30일(양력) 4번째기사 "한효순, 정인홍 등에게 죄명을 벗겨주고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켜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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